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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자 한 겹으로 세계를 덮다
  • 2025.05.21

씨엔원 정재학 대표이사의 100년 로드맵

(주)씨엔원 정재학 대표이사
(주)씨엔원 정재학 대표이사

[K뉴스통신 = 박동웅 기자] 동탄의 낮은 하늘을 딛고 우뚝 선 회색 건물 안, 대표실 문은 늘 활짝 열려 있다. 정재학 씨엔원 대표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사무실 바닥에 튄 작은 얼룩을 발견하는 순간, 스스로 걸레를 들고 허리를 굽히는 일이다. ‘구글식 창의성’이니 ‘MZ세대와의 소통’이니 하는 말보다, 스스로 몸을 움직이는 경영 철학이 먼저였다. “젊은 친구들을 어떻게 쫓아가겠나?”라며 그가 덧붙였다. 그러나 이 소박한 리더십은 곧바로 20 조 원을 넘어서는 글로벌 반도체 장비 전쟁으로 연결된다. 씨엔원이 다루는 ALD(Atomic Layer Deposition) 장비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 같은 거대 기업의 라인 속 핵심 공정을 책임지며, 세계가 인정한 ‘한국산 기술’의 자존심으로 떠올랐다.

원자 박막으로 그린 한국의 초격차

“ALD는 원자·분자 단위로 박막을 증착할 수 있다”고 정재학대표는 단언했다.

나노수준의 원자층 증착 기술(ALD – Atomic Layer Deposition)은 1974년 핀란드 순톨라교수 그룹이 처음 발표한 기술로, 원자 단위로 박막을 정밀하게 증착하는 공법이다. ALD 기술은 당시로서는 시대를 앞선 개념이었고, 산업계에서도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삼성전자가 반도체 메모리 집적도를 획기적으로 높이기 위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ALD의 잠재력이 드러났다. 2000년대 초반 반도체 양산 라인에 세계 최초로 ALD 공정이 적용되면서, 이 기술은 본격적으로 상용화되었다.

씨엔원은 그 흐름을 타고 2008년 창립했지만, 거대한 양산 시장이 아닌 ‘R&D 틈새’를 파고드는 전략을 택했다. “우리는 양산용 ‘그랜저’가 아니라 주문 제작 ‘포르쉐’를 만든다”고 그는 비유했다.

그 결과 씨엔원 장비는 대학·정부출연연·대기업 부설연구소에 300여대 이상 설치됐고, 그중 40여 대가 해외로 나갔다. 미국 Applied Materials의 연구소만도 10여대이상이 사용 중이다. ALD가 깊은 트렌치와 3D 실린더 구조에 균일한 코팅을 남기며 반도체 미세화의 숨은 공로자가 된 덕분이다. 태양전지 패시베이션, OLED 보호막, 의료용 기기에의 정밀한 코팅, 배터리 소재에의 코팅으로 효율의 향상과 안정화까지. 원자 한 겹은 산업 사이를 자유롭게 가로질렀다.

“블루오션은 틈새에 있다” 글로벌 5.8%의 내실

씨엔원의 지난해 매출은 180억여원, 그 중 절반 이상이 수출에서 나온다. 시장조사기관 Yole이 집계한 세계 R&D ALD 장비 매출 점유율 5.8%는 단순한 숫자를 넘어 ‘코리아 ALD’의 존재감을 증명했다. 정재학대표는 “글로벌 넘버원이 될 때까지 수출 비중을 더 키우겠다”라고 강조했다. 그의 지도에서 빨간 핀은 이미 미국·일본·중국·대만·싱가포르·인도·러시아를 찍었고 올해는 핀란드와 유럽 본토로 번졌다.

이 무대에서 정 대표가 가장 자주 인용하는 키워드는 ‘사관학교’다. “우리 회사에서 2~3년 배운 엔지니어들이 중견기업이나 대기업으로 옮겨 간다”는 현실을 자조 섞어 말하면서도, 그는 이를 국가적 인재 파이프라인으로 해석했다. 경력직이 정착하도록 책임과 권한을 과감히 부여하고, 프로젝트별 자율제를 운영한다는 설명이 따라붙었다.

동탄 인근 산업단지는 교통과 주차, 주거환경이 젋은층을 유입하기에는 상대적으로 열악하다. 그는 화성시가 지원하는 청년 기숙사 확보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현실적인 문제 해결 없이는 젊은 인재 유입이 어렵기 떄문이다.

소·부·장 이후, 현장 목소리가 묻는 것

“아베 신조 덕분에 중소 반도체 업체들의 숨통이 트였다.” 2019년 일본 수출 규제는 역설적으로 한국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산업에 ‘정밀 소재,부품,장비 국산화’의 깃발을 꽂았다. 씨엔원 역시 2024년 한해에만 정부 과제 6건을 소화하며 기술 저변을 넓혔다. 그러나 정재학대표는 정책의 일관성을 누구보다 절실히 요구한다.

“기술은 100년 대계로 가야 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산업 기조를 흔들면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건 기업이다.”

러시아 수출이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전면 차단된 경험, 에너지 정책이 정권 교체마다 뒤집히며 관련기업들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현실 모두 그에게 뼈아픈 사례다. 동시에 그는 화성상공회의소 상임위원, 화성시 수출기업협회 회장으로서 지방정부의 주차·교통 SOC 확충, 청년 기숙사 공급, 산업단지 대중교통 개선처럼 ‘작지만 결정적인’ 현장 요구를 쉴 새 없이 전한다.

화성에서 자라는 글로벌 드림

동탄역 인근 동탄산업단지가 몰아내는 굉음 속에서도, 정재학대표는 지역 경제를 ‘한국 제조업의 미래 실험장’으로 정의한다. “서울·부산에 이어 상공회의소 순위 3위, 104만 인구가 몰리는 도시”라는 그의 설명은 통계가 아닌 체감이었다.

ALD 장비는 여기서 출발해 북미·유럽·아시아의 반도체 라인으로 퍼져 나간다. 세미콘 코리아와 세미콘 차이나, 세미콘 웨스트, 그리고 세미콘 재팬을 돌며 얻은 글로벌 네트워크가 밑거름이다. “중국이 10년 안에 미국 경제를 추월할 것”이라는 전망도, 정 대표에게는 위험이 아닌 시장 확장 신호다. 미국의 압박이 중국 내수 기술 투자를 오히려 부추긴다는 현실을 누구보다 냉정히 읽는다.

원자보다 가벼운 꿈, 그러나 100년은 무겁다

마지막 질문에 그는 짧게 대답했다. “씨엔원은 ALD 장비 분야에서 글로벌 넘버원이 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그의 시선은 이미 다음 전시회의 세계지도 위에 머물러 있었다.

화성의 좁은 골목과 세계 반도체 지도 사이를 잇는 실은, 불과 1 나노미터 두께의 박막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한 겹이 전류를 달래고, 빛을 붙잡고, 배터리를 식히며, 결국 사람의 삶을 확장한다는 사실은 무겁다. 씨엔원 정재학대표는 그 무게를 견디기 위해 스스로 먼저 커피를 타고, 사관학교를 자처하며, 정책의 빈틈을 소리 높여 지적한다.

9200자에 가까운 긴 대화 속에서 가장 자주 반복된 단어는 ‘글로벌’도 ‘수출’도 아니었다. ‘가능하다’—CN1, ‘Can Number One’. 그는 이 말을 웃으며 설명했다. “1등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원자 한 겹의 얇은 꿈은 그렇게, 100년의 시간을 견딜 준비를 마쳤다.